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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업적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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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업적 소개

 

정조시대에는 뛰어난 인재가 정말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시대적인 흐름상으로

선진적인 청나라나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 받았던 문화적 충격이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정조가 노론벽파에 의하여 좌지우지되는 정치에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정치에서 소외된 뛰어난 인재들을 등용하다보니

유학에만 전전하는 기존 인재들과는 다른

조금 더 현실적이고 현명한 선비들이 많이 나타난 듯 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이가 있으니 그가 정약용이죠.

 

 

실학의 완성자

 

완성자라거나 집대성을 했다는 말은

뭔가 아주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다는 느낌이 드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그 단어도 정약용에게는 전혀 어색함이 없어보이네요.

 

그의 저서를 일단 살펴보겠습니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마과회통 등이 대표적인 저서입니다.

여기서 책 내용의 면면을 살펴봐도 정치, 종교, 의학, 농업, 과학기술 등

다양한 면으로 다루고 있어서 그는 과히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과도 같은

천재적인 재능과 노력을 가진 선비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토지제도 개혁안 마련

 

정약용의 업적은 토지제도에서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여전제와 정전제입니다.

그럼 그가 꿈꾼 토지제도는 어떤 내용이었는 지 알아보도록 할게요.

 

- 여전제 : 한 마을을 단위로 하여 공동으로 소유하면서 경작하는 제도입니다.

경작 후에 분배의 방법은 일한 만큼 주는 것입니다.

결국 농토를 요즘으로 치자면 공장으로 볼 수 있겠고,

그쪽에서 일한 근로자의 작업일수에 따라서

정확하게 나눠주는 제도로 볼 수 있겠네요.

 

- 정전제 : 그가 유배지에서 생각해냈던 토지제도입니다.

여전제는 실제로 당시의 사회나 제도상으로 실현이 쉽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업그레이드하여 내세운 새로운 토지제도입니다.

 

토지를 '井'자 모양으로 9등분으로 나누어서 경작하는 방법입니다.

8가구가 8개의 농지를 경작하고,

중간에 있는 농지는 공동으로 경작하고

이 농토에서 나오는 농작물은 세금으로 바치는 제도입니다.

 

나름대로 아주 실현가능성이 있어보이나

아쉽게도 당시의 갑갑한 선비들에게는 귀찮은 제도안이었을 뿐이었겠죠.

 

거중기를 이용하여 수원성 축조

 

드라마 '이산'에 의하면 정조는 수원성을 완공하면,

수도를 한양에서 수원으로 옮길 계획이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한양은 이미 노론벽파가 장악한 도시라고 보고,

그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도읍을 옮기는 것이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수원성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인력이나 경비가

들어야만 했지만, 정약용은 거중기를 개발하여

아주 적은 경비로 나름 훌륭한 성을 완공한 것입니다.

 

하지만, 정조는 수원성이 완공된 1년 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가 생각하던 거대한 구상은 결국 물거품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수원성으로 현재 우리들에게 좋은 문화유산으로 남아있죠.

이 성은 훌륭한 군주와 뛰어난 천재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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