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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업적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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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업적소개

 

최치원은 6두품 출신으로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학자로

통합니다. 그는 당시의 골품제도에 의하여 뛰어난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그 능력을 펼치지 못한 비운의 실력자였습니다.

 

"난 당나라에서도 인정받는 학자인데,

신라에서는 6두품이라고 무시해ㅠㅠ"

 

6두품은 당시 아찬의 벼슬이 최고의 위치였고, 이는 17관등 중에서

6등위에 해당했습니다. 그가 살던 시대는 신라의 말기로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일어나 다시 후삼국시대가 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아주 어려운 시기에 뛰어난 인재가 있었음에도

고지식한 성골과 진골귀족들에 의하여 천재 6두품 최치원은

그냥 평범한 신라의 문장가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최치원의 업적에 대하여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며, 황소의 난을 진압했다.

 

어릴 때 부터 천재기질을 보였던 최지원은 당나라로 건너가서

18세가 되던 나이에 장원에 급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벼슬을 얻게 되었고, 당시 황소라는 자가 왕의 정치에 불만을 가져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최치원은 그에서 '토황소격문'이라는

글을 써서 난리를 진압하는 뛰어난 재주를 보여주는 업적을 남겼습니다.

 

당시 신라에 이렇게 뛰어난 재주를 가진 학자가 존재하는 지에

대하여 최고의 선진국이었던 당나라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계원필경 등 우수한 서적을 많이 남겼다.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17년간 벼슬을 하면서 아주 뛰어난

서적을 많이 남겼다고 합니다. 그는 이후에 신라로 건너와서

그가 지었던 서적을 다시 편찬하였으나, 그 중에서 계원필경만

존재한다고 합니다.

 

계원필경은 그가 남긴 시문집으로 어떤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 지는

잘모르겠지만, 당나라 유학시절에서 겪었던 신라에 대한 그리움,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야망 등을 주제로 한 시가

아니었을까하고 생각을 해봅니다.

 

진성여왕에게 시무10조를 올렸다.

 

당나라에서 배운 다양한 선진적인 경험과 학문들을 토대로

진성여왕에게 시무10조를 올려 당시 신라의 개혁해야 할 부분을

제시하였습니다. 그가 6두품이라는 한계때문에 실행에 옮기기에는

성골과 진골의 귀족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힘들었습니다.

 

"6두품은 벼슬이 아찬밖에 안되는 데,

이 벼슬로 무슨 개혁을 한단 말인가!!"

 

그리고 서서히 신라의 정치에 매력을 잃고,

은퇴를 결심하였습니다. 여기저기를 떠돌며 홀로이 지내면서

유유자적하게 삶을 보냈다고 합니다.

 

유불선의 통합을 주장했다.

 

최치원은 당시 통일신라에서 존재하던 불교와 도교에

유학을 포함시켜 세가지의 조화를 이루어 이를 통합하려고 하였습니다.

그의 유학에 대한 시도는 고려시대에 최승로 의하여

다시 이어지는데 당시로서는 유학의 존재자체가

조금은 낯설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이 뛰어난 천재가 통일신라가 아닌 다른 더 좋은 시대에 태어났다면,

조금 더 그 뜻을 펼치기에 상황이 나아졌을 것이며,

나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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