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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쇄국정책 찬성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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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쇄국정책 찬성 의견

조선시대 이하응(흥선대원군)의 생애를 둘러보면,

참 파란만장했고, 어떻게 보면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뛰어난 영웅의 면모를 가진 인재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 시기는 조선의 국력은 쇠약했었고,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무엇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는

엉망투성이였다는 점이 그를 힘들게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흥선대원군이 혼자 그렇게 무거운 짐을 지기에는

너무도 해야 할 일이 많았기에

설사 그가 모든 것을 다 이루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쇄국정책을 펼친 그를 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봅니다.

 

 

이미 개혁을 한번 했으므로

또 한번의 개혁은 국민의 부담이 가중된다.

 

그는 이미 한번의 개혁을 했고, 그로 인하여 많은 유생들이

그 정책에 반발했으며,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의 희생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당시 백성들의 불만도 제법 쌓여 있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당시 경복궁 제건의 공사는 지금의 4대강 공사만큼이나

사회적인 이슈가 될 수 있을 만한 사건이었겠죠.

 

그런 상황에서 또 다시 서양의 국가와 문호를 개방한다는 것은

불만이 가득한 백성들과 무리해서 비틀거리는 조선의 경제가

버티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현명한 정치인 흥선대원군은 생각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문호개방은 꼭 필요한 작업이었지만,

당시의 상황상 약간의 시간이 필요한 시기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듯 합니다.

 

□ 유교에 익숙해져 있던 백성들에게 갑작스런 문호개방은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이미 조선은 천주교 박해로 인하여 서양문물의 유입에 대한

어려움을 경험했습니다. 천주교 또한 일신교로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는

패쇄적인 면은 있으나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누리는 것은

민족과 인종을 차별하지 않는 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유교는 사회적인 질서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면이 많은지라,

현재의 상황을 안정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새로운 개혁을 이루기에는 어려움이 많이 있는 학문입니다.

 

그런 유교에 500년 가까이 익숙해져 있는 조선이라는 국가가

갑작스럽게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으로 느껴집니다.

 

만약에 문호개발을 했다고 치더라도,

당장 물질적인 편리함은 있지만, 안그래도 어지러운 국면에 있는

조선이 서양문물로 인하여 민심은 도저히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난잡하게 돌아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 당시는 외부적인 개혁보다

내부적인 개혁이 더욱 필요한 상황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집권 후에 이전 왕조부터 왕실의 기강을 문란하게 했던

안동김씨와 지방의 유생들과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나름대로 유능한 흥선대원군은 당시 조선을 어지럽게 하던

서원의 철폐라는 정책으로 그나마 그전의 왕조에 비하여

왕실의 힘이 조금은 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조선 말기의 상황은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이 많았던 시기라

외부의 문물을 받아들이기에 앞서서

일단 내부정리를 하는 것이 우선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일단 집안이 안정되어야

모든 일이 잘 풀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집안이 엉망인데 그것을 팽개치고,

바깥의 일을 먼저 취급하는 것은 순서가 틀렸다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찬성의 입장을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 일단 정신적인 부분부터 개방을 이룬 후에

물질적인 개방을 하는 것이 순서다.

 

천주교를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마당에 문호개방이라는 것은

어찌보면 모순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일단 백성들의 마음이 천주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했습니다.

당시에 천주교를 박해하는 상황이 많았기에,

일단 문호개방에 앞서서 이러한 조선의 천주교도를 이해해주는 것이

우선의 과제가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또한 그들을 박해하려는 무리들에게

천주교를 이단이 아닌 정상적인 종교로 인정을 하도록 유도를 한 후에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무작정 모든 문물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 과정에서 너무도 많은 혼란이 있을 것이고

이로 인하여 많은 피를 흘리는 일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부분을 먼저 받아들이고,

이에 성공을 한다면 서양과의 문물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맞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들이 무작정 받아들일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서양의 문물을 이해할 수 있도록

왕싱에서 다양한 노력을 해주는 것이 올바른 순리가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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